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요다 야스미츠 (문단 편집) == 선수 시절 == [[파일:external/www2.myjcom.jp/20160819.jpg|width=450]] [[이바라키]] 현 쿠지 군 다이고정 태생으로 미토 상고[* 이바라키 현립이며 [[이가와 케이]]가 후배이다. ] 졸업 후 1953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니시테츠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데뷔 첫 해부터 주전 [[유격수]]로 자리잡았는데 경기 때마다 번번히 실책을 저질렀고 그것도 대부분 적시 에러였는지라 팬들의 원성이 높았던 것은 물론 구단 고위층에서도 "쟤를 왜 쓰는 거냐? 당장 빼라!!" 면서 대놓고 씹을 정도였지만, 감독이던 [[미하라 오사무]]는 들은 척도 않으며 묵묵히 토요다를 계속 기용했다. 게다가 신인답지 않게 성격이 옹골차다 못해 뻔뻔했던(...) 토요다는 "타격으로 만회하면 될거 아니냐"고 되받아치며 그의 진가를 타격에서 여실히 보여주었다. 입단 첫해인 1953년 시즌 동안 무려 '''45개의 실책'''을 기록하였지만, '''타율 0.281 27홈런 59타점 25도루''' 라는 준수한 성적은 토요다의 말 그대로 터무니 없는 실책수를 커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더구나 시즌 27홈런은 고졸 신인사상 최다였고, 1986년 [[세이부 라이온즈]]의 신인 [[키요하라 카즈히로]]가 31홈런으로 경신할 때 까지 33년간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이후 고비 때마다 [[정신줄]] 반납한 듯한 실책은 계속되는 등 유격수로서의 수비는 거칠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파이팅으로 커버해 나갔고,[* 3루수이던 [[나카니시 후토시]]와 함께 [[금강불괴(스포츠)|금강불괴]] 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허슬 플레이를 펼쳤다.] 타선에서는 역대 최강의 2번 타자로 [[나카니시 후토시]], [[오시타 히로시]]와 함께 이른바 '''유선형 타선'''(수소폭탄 타선이라고도 불렸다)을 구축하며 1950년대 중반 니시테츠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니시테츠가 1956~1958년 3년 연속으로 일본시리즈를 제패할 때 당연히 토요다는 핵심 선수로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데 크게 한몫 했으며, 1956년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하기도 하였다. 1959년 시즌 종료 후, 감독이자 스승으로 존경하던 [[미하라 오사무]]가 팀을 떠나고 중심타자 이던 [[오시타 히로시]]는 은퇴, [[나카니시 후토시]]는 부상으로 타격이 쇠퇴하는 악재가 겹쳤지만 토요다는 변함없이 안정적이고 폭발력 있는 타격으로 팀의 타선을 지탱했다. 1962년 나카니시가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하자 토요다는 그를 도와 선수 겸 조감독으로 힘을 보탰지만, 시즌 종료 후 1963년 고쿠데츠 스왈로즈([[야쿠르트 스왈로즈]] 전신)로 트레이드 되었다. 고쿠데츠에선 자신의 포지션이던 [[유격수]] 대신 주로 [[1루수]]로 뛰었고, 7시즌 후인 1969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17년간 '''1814경기 출장, 1699안타 263홈런 888타점 215도루 타율 0.277'''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